노예 12년, 흑인 노예들의 처절한 삶
흑인 노예 제도와 그들의 처절한 삶에 대한 영화는 예전에 정말 많았다. 하지만 영화를 보고나면 밀려오는 우울함이 싫어서 잘 찾지 않았지만, 최근 관람한 <노예 12년>과 <버틀러 : 대통령의 집사>는 오래도록 기억될 좋은 영화였다.
■ 자유를 박탈당한 흑인 노예의 삶을 처절하게 그린 영화 <노예 12년>
아직 노예제도가 사라지지 않아 흑인은 그저 백인들의 노예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던 시절인 1841년. 솔로몬 노섭(치웨텔 에지오포)는 두 명의 아이, 부인과 함께 자유인의 삶을 살던 음악가였다. 흑인 노예제도가 여전히 남아있던 시절이었지만, 법적으로 '자유인'에 속하게 되면 흑인 또한 음악가도 될 수 있고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는 시대다.
하지만 그의 행복은 멋진 제안과 함께 함께 일하자며 접근한 두 명의 백인에 의해 깨져버린다. 만취 상태에서 깨어나보니 외딴 창고에서 손발이 묶인 상태였던 것. 그는 이리저리 발버둥을 쳐보지만, 그를 노예 신분으로 전락 시키고 노예가 허용되던 루이지애나 주에 '플랫' 이라는 새 이름을 받고 끌려가게 된다.
처음 끌려갈 때만 해도 '자유인' 신분을 증명할 법적 증명서가 있으며 자신이 솔로몬 노섭이라는 이름을 갖고 있다고 계속해서 어필하게 되지만, 오히려 글을 읽을 줄 알고 지식이 많다는 인식이 생겨 폭행과 욕설, 동물보다 못한 취급을 받으며 흑인 노예로써의 관리를 받게 된다.
자유를 갈망했으나 12년간 노예 생활을 하게 된 그는 두 명의 주인 윌리엄 포드(베네딕트 컴버배치), 에드윈 엡스(마이클 패스벤더)를 만나게 되며 각 주인에게 정반대의 대우를 받게 된다.
<노예 12년>은 실화를 바탕으로 제작된 작품으로 실제 억울한 노예 생활을 한 원작자가 1800년대 미국에서 영화와 동일한 이름의 책을 출간했고, 이 책은 '노예제도'에 대한 반대 여론을 불러일으킨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 <버틀러 : 대통령의 집사> 를 떠올리게 만든 흑인 인권에 대한 영화
얼마 전, 1952년부터 1986년까지 무려 34년간 대통령의 곁에서 버틀러 생활을 한 '세실 게인즈'의 이야기를 실화를 바탕으로 제작된 <버틀러 : 대통령의 집사>라는 영화가 있었다. 이 영화는 흑인 인권 운동 초기와 자유를 되찾는 시기까지 백인들의 틀 안에서 생활하는 아버지와 선두에 서서 흑인 인권 운동을 하는 아들간의 대립 구조를 그려냈다.
흑인들이 백인들 틈에서 어떻게 자유를 되찾았으며, 그들의 대우가 어떻게 바뀌어가는지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지만, 그들의 삶이 그리 처참하지만은 않았다. '세실 게인즈'의 어린 시절은 노예인 부모님 곁에서 보냈지만, 그가 어른이 되고 가정이 생겼을 때는 백인과 흑인이 서로 다른 영역에서 존재해야 한다는 차이점만 있었지 노예의 처참한 삶을 살진 않았다. 하지만 평등하지 않았고 백인들로부터 평등과 자유를 얻어냈다.
<노예 12년>은 <버틀러 : 대통령의 집사> 보다 약 100년 전 내용을 담고 있다보니 흑인들은 노예의 삶을 살아가는 이가 더 많았다. <버틀러 : 대통령의 집사>는 평등하지 않은 그들의 삶이 안타깝다는 생각을 하게 했지만, <노예 12년>은 그들의 삶이 처절하다는 생각을 하게 했다. 그래서 <노예 12년>은 영화를 보는 내내 마음이 불편했고, 끝나고 나서는 멍한 상태로 한동안 움직일 수 없는 상태를 만들어냈다.
앞서 설명한 것처럼 '솔로몬 노섭'은 12년간 두 명의 주인 밑에서 노예 생활을 하게 된다. 첫 번째 주인인 윌리엄 포드는 흑인들을 '인간 이하'로 취급하지 않고 인자함과 양심을 가진 사람이었다. 덕분에 솔로몬 노섭은 주인에게 자신의 바이올린 실력과 더 많은 수익을 가져다 줄 수 있는 방법 등 자신의 재능을 인정 받아 '자유인'의 삶으로 돌아가려 애쓴다.
주인에게 칭찬 받고 '바이올린' 선물을 받으며 '희망'의 메시지를 노섭과 관객들에게 전달해준다. 하지만 그의 재능을 시기한 노예 감시원들의 반감을 사, 목이 졸린 채로 나무에 매달리는 고초를 겪게 된다. <노예 12년>에서는 발끝으로 간신히 땅을 디뎌 목이 매달린 채로 살아남으려 애쓰는 그의 모습을 굉장히 긴 시간 할애하여 보여준다. 주변의 흑인 노예들은 자신의 일이 아니라는 듯 무심하게 쳐다보고 자신의 일만 묵묵하게 하는 노예의 모습을 보여준다.
<노예 12년>은 자칫 지루할 수도 있는 예술 영화가 아닌 '자유 의지'에 초점을 두고 노섭의 12년간의 노예 생활을 빠르게 그려나간다. 처절하고 처참하다. 처음부터 끝까지 잔잔하게 진행하는 듯 하면서 곳곳에 흑인 노예의 삶을 살아간 사람들의 울분과 불안감, 그들의 불행을 토해내듯 빠르게 보여준다.
첫 번째 주인과는 극명하게 다른 두 번째 주인인 '포드'를 만나는 이후부터는 흔히 알고 있는 흑인 노예들의 억압과 고통을 그려내고 있다. 매일 아침 기독교의 복음을 전파 한다면서 성경을 읽지만, 그 내용이 아닌 흑인 노예들은 하나님이 그런 삶을 살도록 점지해주셨고, 주인의 말을 듣지 않으면 50대, 100대, 200대도 맞을 수 있다는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도록 종교를 이용하는 장면이 나온다.
권력을 가진 자의 종교에 대한 자의적 해석으로 얼마나 어처구니 없는 일을 벌여왔는지 지난 역사가 말해주듯 <노예 12년>은 기독교와 인간의 이중성에 대한 이야기도 슬그머니 꺼내들어 관객을 자극한다. 서구 역사가 '종교'를 명분으로 쓴 피의 역사가 많아 그 가치가 무의미할 수 있다는 점을 '엡스'의 모습으로 그려내고 있다.
<노예 12년>은 전반적으로 굉장히 만족스러운 영화로 남겠지만, 결론을 너무 갑작스럽게 내리며 극적인 장면에서 감동을 주지 못하고 허무함을 전달해준다는 아쉬움은 남는다. 하지만 흑인 노예들의 삶에 대한 과거 역사적 사실을 다시금 떠올려 볼 수 있는 작품성 있는 영화이다. 지금은 아무렇지 않게 대부분의 사람들이 누리고 있는 자유와 희망, 인권 등에 대해 그 소중함을 일깨워주는 영화라고 생각된다.
評. 하늘다래